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은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끌려가 광산, 공장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 땅에 끌려왔던 조선인들은 고향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일본을 떠났다. 하지만 일부 조선인들은 미국의 통제로 일본을 떠나지 못하고 일본 땅에 머물러야 했다.
한덕수는 일본 땅을 떠나지 못하는 조선인 동포를 위해 조선인총연합회를 결성하고 동포들을 보호하는 데 앞장선다. 한덕수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우지 못하는 동포들을 위해 사범학교를 세워 조선인 사회가 있는 곳으로 교사들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한덕수의 노력으로 일본 내에 조선인 학교가 200여 개가 생겼다.
한편 한덕수를 중심으로 한 조선동포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미국과 일본은 조총련 조직을 없애려 하였다.
1952년 5월 1일 노동절을 앞두고 조총련 내에는 일본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동포사회의 권위가 높아진다며 일본 공산당의 시위에 동참하자는 의견이 모인다. 하지만 한덕수는 일본의 문제는 일본인에게 맡겨야 한다고 반대한다.
한덕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총련은 5월 1일 시위에 앞장선다. 결국 시위는 일본의 무력진압으로 끝난다. 미국과 일본은 이 시위를 빌미로 조총련 조직을 와해하고 조선인 학교를 폐쇄한다.
조총련 조직이 풍비박산난 것을 본 한덕수는 쓰러진다. 쓰러졌던 한덕수는 김일성의 친서를 받는다. 김일성의 친서에는 우리 민족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편지는 국제 공산주의의 일국일당 원칙에는 맞지 않지만 중국 공산당 시절부터 우리 민족의 문제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면서, 이에 대해서는 일본공산당 서기장에게 통보하였다고 적혀 있다.
김일성의 친서를 받아들고 조총련 조직 건설의 새로운 방침을 받은 한덕수는 새로운 희망을 갖고 새롭게 총련 조직 건설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