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960년 민예총 소속의 작곡가 김옥성은 예술에서도 혁명적 성과를 내자고 음악인들에게 호소한다. 예술인들은 민족음악을 발전시키자는 김옥성의 의견에 찬성한다.
그러나 북한의 예술인들은 여전히 서양 형식에 빠져 당과 인민이 원하는 예술작품들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옥성은 작곡에서 민족적 가락을 활용하자고 주장하지만, 많은 예술인들은 옥성이 인민대중의 삶이 어려운데도 자연의 아름이나 노래하는 자연주의자라고 비판한다.
어느 날, 리촌 시당에 있는 김일이 옥성을 찾아온다. 마침 옥성은 현심을 서울로 다시 데리고 올라가려는 현심 오빠 때문에 <락랑공주> 공연이 엉망이 되어 마음이 상해 있었다. 옥성은 문맹퇴치를 위해 힘써달라는 김일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현심은 인민들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간학교 교원으로 간 옥성을 따라 자신도 야간학교의 교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화려하고 세련된 현심을 본 야간학교 여학생들은 자신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현심에게서 이질감을 느낀다. 현심은 여학생들의 머뭇거리는 모습을 오해하여 수업을 그만 두고 나가버린다. 현심은 뒤늦게 순녀로부터 이러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자신의 모습을 반성한다.
한편, 옥성은 여학생들과 함께 공장에서 노동하며 이들과 가까이 지낸다. 자신들의 노래도 만들어 달라는 여학생들의 부탁에 옥성은 밤을 새서 새 노래를 만들어 낸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일은 매우 반기며 기뻐한다.
옥성은 공장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작곡하여 노동하는 여성들에 대한 노래를 완성하고, 그 노래는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곳곳에서 불린다.
옥성의 노래를 들은 김일성은 노동현장을 아주 잘 반영한 훌륭한 노래라며 작곡가 옥성을 평양의 협주단으로 불러 훌륭한 작곡가로 키우라고 한다.
작곡가 리동혁은 옥성의 도움을 받아 노동현장에서 일꾼들의 기운을 복돋는 노래들을 작곡한다. 이 노래들은 전통 가락을 활용하여 인민들의 높은 인기를 얻게 된다.
어느 날, 옥성은 김일에게 김일성의 업적을 서사시적으로 담은 노래를 작곡해 보고 싶다고 제안하고 김일은 그런 옥성의 생각을 칭찬하며 독려한다.
어느새 현심은 이전의 서울 여성이 아닌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하며 작곡도 하고 선생도 하는 여성으로 변화되었다. 현심은 옥성과 함께 노동현장에서 부를 수 있는 곡들을 작곡하며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곡가가 된다.
[2부]
옥성은 김일성에게 언제나 현장에 나가 있는 종군작곡가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옥성은 한국전쟁 당시 문예총으로부터 ‘섬멸의 길’이 계급적 감정이 없고 염세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옥성은 이러한 비판에도 전쟁터와 노동현장에서 직접 겪으면서 느낀 감정을 음악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옥성에 대한 예술단체들의 비판은 높아져만 가고, 결국 옥성이 만든 음악들은 보급정지를 당한다. 옥성의 친구 천명은 상부가 요구하는 음악을 만들라고 충고하지만 옥성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옥성은 국제축제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쟁터를 떠나지 않고 현장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음악으로 만든다.
한편, 현심도 군대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한다. 현심은 유명한 배우이자 학교 선생이라는 예전의 직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른 군인들을 돕고, 전쟁에 지친 군인들을 위해 노래로 위로한다.
어느 날 옥성과 현심은 전쟁터에서 재회하지만 짧은 상봉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다시 헤어진다. 그러던 중 339고지를 수복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고 옥성과 현심은 이 전투에 참전한다. 총알과 폭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에서도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노래를 부르던 현심은 큰 부상을 당해 목숨을 잃는다.
옥성은 현심이 죽어가면서까지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녀성의 노래’ 악보를 보며 더욱 자신의 의지를 굳게 다진다. 옥성이 작곡한 ‘섬멸의 길’을 들은 김일성은 이 노래를 매우 칭찬하며 직접 ‘결전의 길’로 노래의 제목까지 바꾸어 준다. 이 소식을 들은 옥성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한다.
옥성은 전쟁이 끝나자 노동현장으로 나가 현장을 반영한 노래들을 만들어 내고 이런 노래들이 곳곳에서 공연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